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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어떤 제약도, 속박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레우코시아 예고로바는 손바닥을 펼쳐 하늘을 가리려 들었다. 본래 하늘이라 함은 자연의 변덕에 따라 구름이 잔뜩 끼거나 푸르거나 해가 지거나 뜨거나 해야만 상식에 맞는 공간일 텐데 이곳은 그저 눈이 시리도록 하얀 공간뿐이다. 하얗고 메마른 손이 쥐락펴락한다. 유일한 이물질은 공간을 멋대로 누비고 다녔는데, 이 공허를 지우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이제 행복할 권리가 있었으니까.

  “로자, 로자!”

  “응?”

  “무슨 생각, 하느라 말을 이렇게 못 들어? 오늘 다 같이 꽃밭 가꾸기로, 했잖아아.”

 상상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곳. 신에게서 도망친 우리는 다른 세계의 신이 되었다. 자신을 로자, 하고 부르는 작은 아이를 본다. 꼭 그를 닮은 연푸른 꽃을 한손 가득 들고 있다. 레우코시아의 입에 잔잔한 웃음이 걸린다. 미안. 하고 사과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원래의 세계에서 도망친 지 어연 무한하고도 무한한 시간이 흘렀다. 흐름이 없기에 우리는 정확한 세월을 가늠하지 않기로 했다. 좋은 꿈을 꿔 기분이 좋으면 그날이 축일이고, 알지 못했던 진리를 깨달아 말하고픈 날이면 그날로 나이를 먹는다. 레우코시아와 그녀를 로자라 칭하는 우라하라 미우는 함께 이 세계로 도망친 아이다.

  “조금 이상한 꿈을 꿔서.”

  “꿈?”

 레우코시아가 미우의 손을 잡고 다른 아이들이 있을 곳으로 이끌었다. “예전의 꿈을 꿨어. 예전의 나를, 너희들을 만나는 꿈.” 미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리더라. 작고.” 저 멀리 우리가 용케 원래의 세계를 흉내낸 거주지역이 보인다. 동화에 나올 법한 통나무집이나 흔히 볼만한 베이지색 주택이 보인다. 맨 처음 궁전만한 집을 지었다가 그 안의 텅빈 방들을 채울 자신이 없어 점점 작아진 것이 지금의 형태다. 깊고 어두운 지하에서 나와 늘 도망치던 삶을 살던 아이들이다. 그렇기에 상상이나 지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화려하지 못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세계를 구현해낸 공간이기에 아름답다. 결코 시들지 않고 벌레가 없는 잔디 위를 걷는다.

 

 그러면서 그 꿈을 다시금 떠올린다. 까마득한 어릴 적을 떠올리지 않은지 오래였는데, 마치 영화처럼 불현듯 나타난 꿈은 레우코시아의 생각을 헤집기에 충분했다. 흰 옷을 입은 신도들 사이의 우리는 신의 아이라 불리며 잡아먹힐 날을 기다리는 제물이었다. 그 지하만이 자신의 최대 적인 줄로 알고 벗어나고자 했던. 교단을, 나라를, 지구를, 우주를 아울러 굽어 살피는 거대한 존재를 모르던 때 말이다. 네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레우코시아는 그들에게 손을 뻗으려다, 조금 지켜보기로 한다. 이윽고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남자아이 하나가 탈출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곧 거대해질 불길을 모르고 날아온 작은 불씨. 그런 이즈무의 현명함은 언제나 우리를 이끌곤 했다.

  “…탈출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해.”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의견을 제시했다.

  “밖으로, 말인가요?” 노논이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지금은 우리 중 가장 차분하고 섬세한 성격을 지녔다.

  “평생 여기서 살 거 아니잖아?”

  “나는 잘 모, 모르지만… 여기 있는 건 싫…으니까아….” 어린 미우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리고 역시 앳된 자신의 모습이 노논이 쓰다듬었다. 예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애틋하고 부끄러울 수 없다. 그렇게 과거의 우리는 탈출을 약속한다. 상처 하나 없는 새끼손가락으로 서로를 엮는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하고 싶어?’

 때때로 과거를 회자하는 네명의 아이들 사이에서 나오던 질문이었다. 이즈무의 목소리에 따라 부질없는 상상이라며 쉽게 와해되곤 했지만, 어쨌거나 지금을 후회하고 싶지 않으므로 그래도 지금이 가장 좋다고 결론 짓기도 했다. 노논은 꼭 그 당시에는 대답하지 않다가 나중에 함께 차를 마실 때면 ‘그래도 여기로 도망칠 것 같아요. 같이 있는 게 좋으니까.’ 하고 뒤늦은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러니 이런 과거에 놓였대도 레우코시아는 자신이 할 일이 없음을 알았다. 그 허무맹랑한 꿈속에서 발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흰 침대와 여분의 신도복, 작은 책상 위에 놓인 노트와 필기구가 나의 전부였던 시절이다. 침대 위에 앉아 시트를 살짝 쓸어내렸다. 보드라운 감촉은 감상에 젖기 충분했다.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기 위해 들어온 열아홉의 나와 마주친다.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을 닮은 어른을 본다. 나는 나를 안다. 아마 경계하고 있을 거였다. 지금을 빠져나가기 위해 곧 차분한 표정을 지을 거였고. 그녀는 꼭 그대로 한다. 어차피 꿈임을 알았기에 나 또한 거침이 없었다.

  “레우코시아.”

  “제가 잘못 들어왔을까요?”

  “난 너야.” 공백만큼의 침묵이 흐른다.

  그런가요.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난 너야. 네가 앞으로 겪을 미래를 알고 있는 너. 시트를 쓸던 손을 들어 깍지낀다. 퍽 메마른 성격을 가진 너와 나는 과거와 미래의 간극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당신이 나라면, 굳이 무언가 하러 온 건 아닐 거예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왜 왔어요?” 우리는 서로의 옅은 시선을 마주했다. 앞으로 더해질 상처나 사건을 일러주는 건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우리는 결국 옳은 선택을 할 거였으니까.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냥, 우리가 보고 싶어서.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더라고. 무지에서 오는 불안조차도 말이야.”

  “…불행하세요?”

  “행복해야지. 그러려고 탈출하는 거잖아.”

  “확답하지 않으시네요. 뭐, 괜찮아요. 저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평화나 행복은 이상이니까.”

  “네, 분명 어렵겠죠. 하지만 나는 해낼 거예요.”

  “우리는 해낼 거야.”

  “당신이랑 나를 우리로 엮는 걸까요. 의뭉스러운 말만 하세요.”

 나는 가만히 고개저으며 작은 가방을 건넸다. 바깥으로 나가 살아가기엔 부족한 짐이었지만, 가진 건 이게 전부였으니까. 그 안에 있는 진주 목걸이와 필기구가 움직임에 따라 뒤죽박죽 흔들렸다. 레우코시아는 그것을 받아들고 단단하게 메었다. 이제 곧 달착지근한 카레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지상으로 오르게 될 거였다. 죽음과 반복의 경계가 코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 가야지. 바깥에서 기다리는 우리가 있잖아.”

 문득 아이들의 얼굴이 스친다. 지금은 별개의 존재일지라도 공백에 들어선 우리는 곧 하나가 되었다. 나는 너이며, 너는 나고, 우리는 하나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어린 레우코시아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쓸었다. 아직 고생을 모르는 얼굴. 이기심과 자만에 똘똘 뭉쳐 사람의 소중함을 몰랐던 나다. 잘 해내고 나면, 꽃밭을 만들자. 곧 잊힐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그곳에 가면 신조차 흉내 내지 못할 만큼 커다란 꽃밭을 만들자. 온갖 종류의 꽃을 심고, 그 속에 파묻혀서 함께 잠자리에 들면 그때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라. 불가능하지 않다. 맹세컨데 가능할 거다.

 그곳은 어떤 속박도,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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