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 하늘, 하얀 땅, 하얀…… 실상은 하늘과 땅의 구분도 없이 온통 하얗기만 한 공간에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우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공간이자 ‘우리’가 존재한다는 증명으로서의 공간이다. 이곳에 온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사람도, 특별한 사건도, 위험한 일도, 자신의 아이들을 잡아먹을 만찬을 기다리는 신도 없이 살아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데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끝없는 공간 속에 혼자가 아니라 너희와 함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짧게 안도의 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밤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밤이라는 시간은 없었다. 다만 오늘따라 유독 잠이 쏟아져 스르륵 눈이 감길 뿐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너희가 있는 이 공간이겠지. 그렇게 잠을 청했다. 잠을 청하다 문득 눈을 뜨니,
소름끼치도록 익숙한 천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데니스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카락이 눈을 찔렀다. 대충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방 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고, 데니스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교단 안의 방이었다. 한때 제 방이었던, 단 한 순간도 편히 마음을 맡긴 적 없었으나 어쨌든 자신이 숨을 쉬며 살아가던 둥지였던 곳. 데니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꿈이었을까. 다소 혼란스러워하며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혼란에 비해 대답은 쉽게 흘러나왔다. 꿈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날 리가 없었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토할 듯 달렸던 일이, 두려움 속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이겨냈던 일이, 죽음에 무뎌졌음에도 끔찍한 삶에서 달아나기 위해 기꺼이 이름을 버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니 그 모든 일이 꿈일 리는 없었다. 잔혹한 신의 세계에서 제 이름을 불러주었던 너희의 목소리가 뚜렷했다. 오직 그것을 믿고 데니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너희는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방에서 나가자 교단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신도들이 보였다. 적당한 대화와 적당한 걸음, 적당한 규율이 존재하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데니스는 이 날이 너희가 도망쳐나가기도 전의 어느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도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 지나갔다. 어린 날을 모두 이곳에서 보냈으니 익숙할 것이 당연한 그들에게서 기시감이 들었고, 곧 그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데니스는 그제야 이것이 꿈임을 눈치 챘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꾸고 있을까. 그 새하얗고 아무것도 없듯 보이는 공간에서도 꿈은 꿀 수 있는 걸까. 여러 생각들이 스쳐가던 중 들리는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너희가 보였다. 앳된 얼굴의 너희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쑥덕거리는 광경이 즐거워 보여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달아났구나. 어쩌면 그 모든 순간은 저때의 너희가 겪기에는 벅찬 일들이었으나, 되짚어 떠올리는 순간들 속 너희는 늘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작게 웃음이 나왔다. 그때의 우리는, 망설임이 없었다.
한참 동안 서서 너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제법 가볍고 소란스러운 움직임으로 한 아이가 다가왔다. 데니스는 그것이 어린 날의 자신임을 알았다. 지금의 자신보다 눈높이가 조금 낮고, 뺨에 살이 조금 더 붙어있고, 입가에 조금 더 큰 미소가 담겨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어린 데니스는 너희의 곁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또 이야기를 들었다. 너희는 불확실한 미래를 앞에 두고도 어떻게 저리도 겁이 없었을까. 세계이자 신이 자신들을 잡아먹으려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 신이 자신의 만찬을 위하여 마음만 먹으면 죽음마저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일까. 데니스는 너희의 곁에 섰다. 너희는 이곳을 나갈 거야. 낮은 중얼거림이 너희에게 들릴 리 없었으나, 왜인지 목이 메었다. 데니스는 한참동안 너희와 어린 자신을 따라다녔다. 교단이 세상의 전부이며 자유라고는 없는 공간 속에서도 너무도 환한 얼굴의 너희에게 데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느리게 멈추었다. 마치 편린이 빛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너희가 가지고 있는 편린은 멈춘 시간 속에 함께하듯 잠잠했고, 데니스의 녹색 눈동자는 멈춰버린 너희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멈춰 있는 너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이때의 너희에게는 즐거운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자신들을 집어삼키기 위해 기다리는 신의 잔인한 미소를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가 이 세계 안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 속에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다만 막연한 자유를 꿈꾸며 갑갑함을 견뎠다. 때로는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는 일이 도리어 희망을 깨뜨린다. 데니스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또 다른 녹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데니스 콜크, 어린 날의 네가 말을 걸어왔다.
“후회해?”
너는 앳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짧은 질문에 수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후회한다는 것은 곧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라고, 데니스는 생각했다. 아직 수많은 죽음을 겪지 않은 그 낯을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았다. 데니스는 이때의 네가 어땠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때의 너는 겁낼 것이 없었다. 곧 마주할 여정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신도들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던 것도, 목숨을 거는 도박에 늘 가장 먼저 손을 들어 나섰던 것도, 모두 단 한 순간도 죽음이 두려웠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편린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데니스는 교단 안에 사는 동안에도 늘 죽음을 꿈꿨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버려져 알지도 못하는 신의 아이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다면 제 생의 마지막에 푸른 바다가 넘실거릴 것 같았다. 그렇게 늘 죽음을 꿈꿨음에도 정말로 죽지 못한 것은, 이곳에 남은 단 하나의 미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너희들이 데니스의 미련이었다.
“후회해, 데니스 콜크?”
너는 제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괜히 쭉 뻗은 손은 너에게 닿지 못했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일지도 모른다. 신이 자신의 만찬을 되찾기 위해 제안하는 타협안인지도 모르지. 이것을 잡는다면 아무것도 모르던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데니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세계를 버리고, 시간의 흐름도 앞으로의 이야기도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가는 길을 또 다시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데니스의 대답은 —
“덴은 후회 같은 거 안 해.”
당연히 또 다시 너희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그것은 곧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길이었다. 너희가 곧 데니스고, 데니스가 곧 너희였다. 어린 날 죽음을 꿈꾸면서도 동시에 죽음을 꺼렸던 까닭은, 제 죽음이 곧 눈앞의 세계에서 너희가 죽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너희를 볼 수 없다면 죽음에 의미는 없었다. 데니스의 모든 선택은 너희에 기반 했다. 어쩌면, 너희가 차지하는 빛의 크기는 데니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컸다. 쏟아지는 바닷물 속으로 잠기지 못해도 괜찮다. 영영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숨을 쉰다고 해도, 그곳에 너희들이 있다면. 도미닉. 레아. 아르네. 너희의 이름을 낮게 읊어본다. 너희를 부름으로써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제게 세계는 오직 너희가 있는 곳뿐이다.
세계가 무너진다. 어린 데니스도, 어린 너희들도, 커다란 교단도 모두 산산조각이 난다. 부서진 조각은 쏟아지지 않고 허공에 흩날리는 바닷물처럼 흩어진다. 그리고는 정적, 곧이어 끝없이 새하얀 공간이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있는 세계. 세계를 버리기로 선택하였으나 그보다 더 값진 세계를 얻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데니스의 가치를 품어주는 이는 너희들뿐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세계ᅌᅦ 노을이 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 없는 노을이다. 이 순간 무언가가 눈앞에 보인다면 그것은 노을이어야만 한다고 데니스는 생각한다. 붉은 노을빛 속에 너희가 있다. 가만히 기다리다보면 곧 완전히 해가 지고 깊은 밤이 찾아올 것이다. 수많은 별이 뜬 밤하늘 아래에 누워 너희의 손을 꼭 잡고 잠에 들어야지. 그것은 꿈 없이 달콤한 잠일 것이다. 후회하지 않으니까. 후회할 것이 없으니까.
후회하지 않아. 데니스는 중얼거린다.
입가에 느리게 미소가 번진다. 세계 밖의 세계에 밤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