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회해?
환한 은발이 어깨 위에서 흩날리다가 멈추었다. 레아는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앳된 목소리들을 뒤로 하며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방금 누가 말하지 않았나. 오늘따라 노을이 더욱 조용한 날이었다.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듯, 아주 천천히 숨을 죽이듯이, 들판 밑으로 해가 몸을 숨겨갔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광경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불안감이 들었다. 저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타오르는 검붉은 하늘. 레아는 발끝을 움츠렸다가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붉은 벽돌이 아름답고 빵 냄새가 고소하게 풍기는 마을로.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했던 언덕 밑으로. 단지 그 곳으로 돌아가는 일만을 생각했다. 아무리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는 마을 입구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의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레아에게는 살아가고 살아남는 일만이 중요했다. 누구보다 빨리 달린다고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곳이지만 여전히 발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였다. 살아야 했다.
도착할 수 없는 도착지라니, 꿈에 불과하구나.
아,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레아는 눈을 떴다. 방금까지 보고 느꼈던 풍경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려주는 하얀 하늘이었다. 사실 모두 구름으로 뒤덮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얀 하늘을 눈에 담았다. 하늘인지, 천장인지 가늠하기 힘든 곳이었다. 레아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한참을 누운 채로 있었다. 이 세계로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 걸어도 막다른 벽이 나오지 않는 세계, 말 그대로 끝을 알 수 없는 백색 세계. 처음과 끝이 모호하다는 것은 사람의 의지를 쉽게 꺾어놓았다. 레아는 이 세계에서 무엇 하나 시작하지 못했다.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힐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곳이었음에도 자주 두려움에 떨었다. 아침과 밤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경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마지막으로 보았던 새벽이 떠올랐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수평선, 진주빛의 포말이 발 언저리에서 너울졌던, 바다의 새벽. 세계의 마지막이 새벽이라니,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참 좋은 시간이야. 바다 또한 그런 공간이잖아. 다 사라져가는 희망의 끄트머리를 붙잡았을 때, 레아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레아는 입술을 열어 기억나는 이름 몇 개를 읊조렸다. 이제 자신을 잊었을 사람들의 이름이기도 했고, 좋아하던 동식물의 이름이기도. 또는 몇 번이고 읽었던 책 제목, 길거리를 걷다가 발견했던 가게 이름, 자주 먹었던 디저트 몇 가지…….
그리고 내 이름. 레아 로페즈. 레아는 자신의 이름까지 외우고 나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잠이 시작됐다. 끝도 없는 세계보다는 끝도 없는 꿈이 나았다.
춤을 추는 아이들이 있었다. 모두 같은 색인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조그만 발은 쉴 새 없이 광장의 돌바닥을 두드렸다. 서로를 빼닮은 형제는 손과 손을 마주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눈을 마주쳐오는 호박색 눈동자들. 조금 더 크면 나눠끼자며 각자의 용돈을 모아 샀던 피어싱이 레아의 손 안에서 굴렀다.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진 피어싱은 사람들의 발에 채여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경쾌한 음악 소리가 뚝 끊겼다. 손을 잡고 있었던 형제들은 멀찍이서 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있는 여자 아이는 순진한 눈을 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밀려오는 거리감에 레아는 조용히 발을 옮겨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레아는 이 꿈을 꾸면서 한 번도 그 거리감을 좁혀본 적이 없었다. 좁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미련을 두기엔 스스로의 현실이 너무 가까웠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꿈에서 레아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 꿈이 끝날 때까지 계속, 계속 걷는 것.
왜 꿈에서 깨지 않지? 레아가 그런 의문을 품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 광장에서부터 백 걸음을 떼고 나면 꿈에서 깼는데. 무의미한 시간 개념 대신 걸음의 수를 되새기면서 레아는 주위를 돌아봤다. 순백으로 가득 찬 풍경. 발자국이나 그림자도 남겨지지 않을 듯한 깨끗하게 빛나는 공간.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던 레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는 걷지 못하겠다. 힘들어,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다른 소리가 비집은 것은 순간이었다.
“힘들어?”
다테 니그룸으로 돌아가기 1년 전은 웃는 날이 웃지 않는 날보다 적었던 시간이었다. 레아는 열차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무심코 눈을 감아 내리는 때가 많았다. 내릴 수밖에 없었고, 내려야만 했다. 그래야 그나마 현재를 버틸 수 있었다. 몸동작을 멈춘 채로 눈만 감은 레아는 기도를 하는 신도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신을 믿지 않은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은 재앙이었다. 저주였다. 자신이 누군가의 식사가 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면 웃지 않는 편이 나았다. 웃음은 보잘 것 없는 희망을 품게 했으므로 레아는 웃지 않았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사는 레아 로페즈는 웃음이 많은 아이였다. 그저 광장에서 형제들과 춤을 추기를 좋아했고, 간식으로 나오는 딸기와 푸딩을 좋아했던 아이였다. 잘 마른 잔디밭에서 낮잠 자는 것을 즐겼고, 나무를 타다가 떨어져서 자주 다치던 아이였다. 밤이면 부모가 읽어주던 동화에 형제들의 손을 잡고 잠이 들던, 평범한 아이였다.
신의 아이들이란 이름으로 보금자리를 떠나야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지. 레아는 이제와 떠올릴 수 없었다. 그 애들은 잘 컸을까, 부모님은 건강할까. 이따금 나를 떠올려줬을까. …보고 싶어 할까, 그리워해줬을까. 단지 그 생각을 했다. 레아는 가족을 자주 기억했다. 몇 밤만 자고 나면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이 깨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레아는 대신 제 곁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곤 했다. 데니스 콜크, 아르네 앤더슨, 도미닉 디트리히…….
“힘들면 잠시 누워 있다가 가도 괜찮아.”
레아는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 아이를 내려다봤다. 저보다는 조금 작고 여려 보이는, …17살의 자신을 말이다. 붉은 뺨을 가진 아이는 레아를 바라보며 샐쭉 웃었다. 그렇게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명랑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저런 목소리를 내본 적이 언제였더라. 레아는 가라앉은 눈을 조금 빛내고선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촉감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이것도 꿈인가.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아이는 짐짓 웃더니 레아의 손을 포근히 잡았다. 마주 앉아 레아의 낯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아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질문에 답할 생각이 없는지 한참을 웃었다. 레아는 신경질 섞인 한숨을 내뱉고선 아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사람이 질문을 했잖아, 그럼 답을 해야지. 아이는 레아와 눈을 맞추다가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대로 레아의 무릎에 고개를 뉘였다. 레아는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이는 그 일련의 변화를 눈에 담으며 다시 눈을 휘어 웃었다. 아이의 두 손이 레아의 뺨에 닿았다. 살살 쓸어주는 손길에 레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맑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네게 질문 세 가지를 할 거야. 이유는 끝에 가서 네가 생각해보자.”
“그 시절이 네게 절망적이기만 했어?”
답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도 잠시, 어느새 레아는 대답을 궁리하고 있었다. 다만 레아는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은 절망적이었다. 신에게 바쳐져, 순순히 잡아먹히기만을 기다려왔던 오랜 시간들은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백색 옷을 입은 채로 백색 건물에서 아침과 밤을 맞이하던 답답한 날들과는 대비되게도 말이다. 막연함은 사실 하얀색을 닮았구나. 레아는 가끔 허용되던 바깥 나들이에서의 바람결에 울고 싶었던 때가 많았다.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떠올리며 베개를 적시던 날도 많았다. 신의 아이들이라니. 나는 그저 우리 엄마아빠의 아이이고 싶었어. 나의 세계는 풀내음이 짙고 음악과 웃음소리가 흘러넘치는 작은 마을이었어. 빵에 치즈와 잼을 발라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오후를 보내는 하루가 나의 세계였단 말이야. 레아는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아니, 행복했던 때도 있었어.”
단지 그 어둠 사이로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레아는 자주 생각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게 만들어주던 이유에 대해서. 비좁은 공간만이 우리들의 세상인 곳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이유. 다테 니그룸에서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 도망가자고 말하던 아이들. 어두운 동굴 입구를 마주하면서도 씩씩하게 발을 옮기던 아이들. 어딘지도 모를 공백으로 나아가야만 했을 때에도 같이 손을 잡았던 아이들. 너희가 있는 곳이 나의 빛과 별, 집이 될 거야. 레아는 혼자 잠들지 못하던 밤이면 중얼거리던 그 한 마디를 뱉었다.
나는, 그리고 너는 혼자가 아니니까. 레아의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두 번째 질문, 네 이름은 뭐야?”
이름이 중요해? 레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내 이름을 알고 있잖아. 열일곱의 레아는 조곤거리며 레아의 뺨을 쓸었다.
아니야, 나는 네 이름을 몰라. 너는 내게 한 번도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 걸. 이름은 중요해. 그 사실을 너는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작은 세계니까. 네가 아직도 이 세상에 있음을 나타내는 증표야. 응, 네가 버린 그것 말이야. 있잖아, 네 이름 알려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네 이름.
바다를 바라보던 날이 아직도 생생했다. 희미해져가는 기억들 중에서도 바다 앞에 서있던 날은 가장 선명했다. 뺨에 스치고 지나간 쌀쌀한 바람이 낯설었다. 작별은 또 다른 만남을 불러온다고들 하지. 레아는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했었다. 내 이름을 버리면 나는 이제 누구지. 나는 여전히 레아 로페즈일 수 있을까. 레아는 손에서 떠나 바다 밑으로 떨어지던 작은 세계를 기억했다. 그건 마치 점처럼 보이기도 했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버린 이름은 어디로 갔을까. 내 이름은, 나는…….
“레아. 레아는 여기에 있어. 다른 어딘가도 아니고, 여기에.”
“맞아, 여기에 있어. 레아, 후회해?”
레아는 이미 얼굴을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울지 않게 된 지도 오래였다. 다테 니그룸에서 도망치면서부터 레아는 울지 않으려고 했다. 울면 금방이라도 무너져서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레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참아왔던 울음을 모조리 쏟아냈다. 열일곱의 레아는 그 눈물을 받아주며 손바닥으로 닦아주었다. 울지 마, 레아. 웃어. 웃으면 누워있다가도 행운이 굴러 들어온대.
후회하냐고? 레아는 후회했다. 눈에 닿는 곳은 온통 하얀색일 뿐인 이 공간에서 레아는 매 순간을 후회했다. 조금 더 그 아이들과 푸른 하늘을 볼 걸. 노을 지는 하늘도 한 번 더 바라보고, 별밖에 보이지 않는 밤하늘도 올려다보고, 어슴푸레하게 빛나서 어떤 말도 허용될 것만 같았던 새벽녘도 지켜보고. 얼음이 낀 겨울바다도, 청명하게 맑은 여름바다도, 꽃이나 낙엽으로 뒤덮인 봄과 가을 바다 도. 오래된 책의 글자나 색이 바랜 풍경화도. 그러고보니 우리 못 가본 곳도 많았지. 모르는 게 너무 많았지.
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을 해볼 걸. 시장에 내놓은 과일 중에 무엇이 더 달까 살펴보는 일이나, 골목길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마음 편하게 아침을 맞아 잘 잤냐는 인사를 건네보거나, 배부른 속에 만족하며 꾸벅꾸벅 낮잠에도 들어보거나. 햇빛 냄새가 가득한 침대에 다 같이 누워서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않으며 웃어보고. 푹신한 베개와 이불에 폭 파묻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집 대청소를 하면서 하기 싫은 일은 미뤄보고, 내일 내야하는 세금에 머리도 아파보고, 맛있는 음식은 먼저 먹으려고 우겨보고. 다투고, 울고, 화해하고, 어색했다가 웃음을 터트리고. 평범한 형제나 친구처럼 내일을 기대하며 하루를 보내는 일. 이미 해봤을 수도 있거나 해본 적도 없었을 모든 일들과 매 순간이 아쉬웠다.
레아는 바다에 편린을 던지면서 이미 각오했었다. 언젠가는 후회할 수도 있으리라고.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믿었다.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여기까지 같이 걸어왔던, 내 인생의 수많은 부분을 함께 했던 이들이 있어서.
“…후회하지 않아.”
무엇에 대한 후회인지 몰랐지만 레아는 그 질문에 단언할 수 있었다. 후회하지 않아, 그 아이들이 있어서.
열일곱의 아이는 환히 웃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레아. 생일 축하해.”
열일곱의 아이는 환히 웃었다.
레아의 귀 언저리에 무언가를 끼워주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은 내 생일이야. 그러니까, 네 생일이 되기도 하는 거겠지? 레아 로페즈가 주는 선물이야. 네가 예전에 잃어버렸던 것. 너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니까 축하의 말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잖아. 그래, 그게 맞아. …레아, 생일 축하해. 그 말을 끝으로 열일곱의 아이는 밝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레아는 바다의 포말처럼 먼지가 되어가는 인영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보답으로 느껴졌다. 완전히 흩어져버린 빛무리는 레아의 무릎, 혹은 그 주위로 내려앉았다. 아이의 잔재가 흔적도 없이 레아에게 흡수되었을 즈음, 레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깜빡, 여상스런 시선으로 하얀 하늘을, 그리고 제각기 떨어져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로 레아는 아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데니스, 아르네, 도미닉.
“사랑해! 알지, 내 마음.”
언젠가의 레아가 그러했듯 명랑하다 못해 청아한 목소리가 하얀 공간을 울렸다. 아주 작은 세계가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시작과 끝이 맞닿기 시작한 날.
레아가 제 귀에 걸린 붉은 색의 피어싱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