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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좋아하는 책은 별과 신화에 관한 것이었다. 별이 된 인간과 신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형광등 밖에 없는 삭막한 천장에 검은 점을 찍는 상상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다. 왜 나는 키가 터무니없이 작을까? 책상에 올라 뒤꿈치를 들어도 천장에 닿기까지는 까마득한 일인 게 서러운 날들도 있었다. 닿는다 해도 책상 위의 천장에만 별을 찍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찍는다 하더라도 그건 별이 아닌 곰팡이 같은 모양새였을 거다. 그걸 알게 된 건 조금 더 자라고 새로 맞춘 단복을 입게 되었을 때였다. 의미 없이 옷자락을 털어낸 뒤 평소처럼 고개를 젖히는데, 그제야 말끔한 천장에 점점이 찍힌 자국들이 보인 거였다. 그건 명백히 별이 아닌 먼지였다.

 별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건 너희였다. 내 최초의 기억을 차지한 너희.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게 무엇이냐 물으면 서로를 살피던 색색의 시선이었다. 아기 오리가 생애 처음 본 것을 어미라 인식하는 것처럼 그 시선들에 사로잡힌 나는 너희를 좇기 시작했다. 그 후로 우린 언제나 함께였다. 손을 잡고 있지 않더라도 하나의 뒤에 셋이 서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책에서는 사람의 운명이 붉은 실로 정해진다던데, 우리의 손가락에는 온갖 색의 실이 묶여있는 듯했다. 빨간 실, 노란 실, 녹색 실, 분홍색 실… 진부한 전개였어도 좋았다. 어떤 어른들도 없이 밖으로 나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손을 꼭 맞잡고 있으리라. 당연한 소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어지러웠다. 갑자기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꿈인가? 어쩌면 하늘에 올라 그토록 바라던 별이 된 걸까? 마지막 기억은 사제님이 높은 교단의 천장처럼 화를 내던 모습이었다. 홀에 서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얌전히 방에 들어가 있으라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여긴 방 앞이었어요 사제님…… 그렇게 울먹거렸던 것 같다. 레아가 손을 잡아주고 데니스가 사제님을 달래고 도미닉이 착한 얼굴로 웃어보였던 기억이 났다. 레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조금 부러워서 나도 똑같이 해보려고 입술을 벌리며 혀를 움직이고 눈을 깜빡였는데, 여기였다. 하늘에 오르는 과정이 이렇게 갑작스러울 리가 없는데. 손을 감싼 온기가 없어 손끝이 시렸다. 마디를 만지작거리며 하염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끝도 없는 설원 같은 공간 속엔 달래줄 사람이 없어 눈물이 말랐다.

 그 사람을 본 건 가느다란 심호흡이 열 번을 채우기 전이었다.

 분홍빛 눈이 선명한 사람이었다. 금발이 나보다 훨씬 길고 나를 보고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사람.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은 그 사람은 먼저 손을 잡아왔다. 길을 잃은 나를 찾아온 줄로만 알았다. 다짜고짜 길을 찾자고 하기에 그랬다. 그렇지만 길을 잃었을 땐 별을 보라고 했는데 여긴 별이 하나도 없어요. 울상을 지으니 웃었다. 우리는 지금 별을 찾아가는 거야.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발이 순순히 움직인 이유였다.

 여긴 어디예요?

 그건 아르… 나도 잘 몰라.

 그런데 별을 어떻게 찾아요?

 이렇게 하염없이 걷다보면… 별이 우리한테 와줄 거야.

 하늘에서 떨어질 별이 없는데……

 그 사람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건 비밀인데 아르네, 아… 나한테는 특별한 별이 있어.

 특별한 별이요? 그 사람은 대답을 주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멈추지 않고 걸어야 했다. 물고기자리가 있는 하늘은 꼭 바다 같다는 말을 던진 그 사람은 이어 내 이름을 불렀고 교단에서의 생활에 대해 물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이름을, 교단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이상한 것도 모르고 잘도 대답을 늘어놓았다. 이따금 사제님들이 무섭다는 것, 그렇지만 노이만님은 우리에게 잘해주어 좋다는 것, 홀에서 올려다보는 천장과 방에서 올려다보는 천장이 달라서 신기하다는 것, 하루 종일 별만 보고 싶은데 배우기 싫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과 데니스와 도미닉, 레아가 있어 즐겁다는 것. 발자국도 찍히지 않는 하얀 바닥에 많은 이야기가 쌓였다. 이름 모를 사람은 노이만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찡그리다가도 자주 웃었다. 특히 셋의 이름을 발음할 때 그랬다.

 무턱대고 하얗기만 한 평지는 넓고도 넓었다. 사실 평지인지 그 끝이 둥글게 휘어졌는지 끝까지 뚝 떨어지고 마는 곳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하얗기만 한 곳이었다. 사제님들이 그렇게 외쳐대던 신이라도 이렇게나 완벽하게 무결한 하양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 텐데.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먼지가 묻던 소매 끝을 매만졌다. 오롯한 미지 속을 거닐고 있는데 두려움은 한 톨도 잡히지 않았다.

 한참 걷다 지쳐 우리는 아무렇게나 앉았다. 이렇게 앉으면 사제님한테 혼나는데. 생각하면서도 털썩 주저앉은 자세가 너무 편해서 고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이 세계의 끝인가요? 모르겠다는 대답만 나왔다. 그럼 언니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고 교단은 또 어떻게 알았나요, 왜 그렇게 전부 이해한다는 웃음을 짓나요, 정말로 언니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질문들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질 않아 혀끝으로 굴리다 녹여 먹어야 했다. 너희라면 어떻게 했을까. 도무지 어딘지 알 길이 없는 곳에서 너무 익숙하고 낯설지 않은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다면… 한 발 물러나서 살폈겠지. 도미닉이 그런 표정을 잘 지을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상상해본다.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별은 없었고 하늘이라고 불러도 좋은지 의심이 가는 하얀색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 저 위인지 아래인지 모를 곳에도 우리를 굽어보는 분이 계실까. 그런 거라면 조금 소름이 끼치는데. 세상 어느 곳에서도 피할 수 없는 신이라니 꼭, 나를 감시하는 것 같잖아. 시선을 내리는데 문득 우리가 앉은 곳이 천장이고 머리 위가 바닥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무심코 마주친 시선에 언니는 별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붉고 노랗고 초록색으로 빛나는 별들이 나를 보면 아주 좋아할 거라며. 우리는 그렇게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쉬었다. 긴 이야기 후에는 다시 일어나 걸었다. 기어이 끝에 닿을 때까지.

 맞닿은 끝은 탄력을 잃은 젤리처럼 물렁거렸다. 어제 간식으로 나온 푸딩 같기도 했다.

 나는 언니를, 당신을 돌아보았다.

 여기가 끝인가 봐.

 당신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 멍한 시선이 울렁거리는 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끝은 처음이야.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나는 가만히 멈춰있었다. 당신의 입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로 오고 나서 이런 걸 본 적도 처음이야. 우리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끝도 벽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당신은 벽을 아주 오랜만에 본다는 이야기를 했다. 얼마나 오랜만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손끝으로 벽을 꾹 눌렀다가 떼었다. 불투명한 벽이 불투명하게 울렁거렸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이름을 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마땅한 이유 없이 그런 기분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건 곧 쓸모없는 다짐으로 변모했다. 나는 이미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이유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별들도 알고 있었다. 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당신은 알고 있을 텐데.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우리 말고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르네, 후회해?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혀가 통제를 벗어난 문장을 빚어냈다. 당신, 아르네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놀란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그러자 당신이 우리가 처음 손을 잡았을 때처럼 눈을 휘어 접었다. 까만 로브 위의 금발이 달처럼 빛났다.

 온통 하얀 공간 속에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나는 하얀색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일 거야. 아르네는 가끔 여기가 너무 무서워. 하얀색밖에 없는 게 분명한데 다른 게 보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하고 아르네는 말을 이었다. 이제껏 그렇게 묻기를 기다려온 사람의 표정이었다. 당신은 나를 기다렸어요? 말이 되지 못한 기대가 숨결을 따라 흩어졌다. 바라는 답이 있는 줄도 모르고 바라고 있었다. 소망에 대한 고찰 없이 시키는 대로 손을 모으는 기도실에서처럼.

 여기엔 별이 있어, 아르네. 안에서도 볼 수 있었던 별이야. 심지어 만질 수도 있어. 하늘의 별과는 달라. 아주 반짝거리고, 아주 황홀한 별들이 있어. 게다가 전부

 아르네는 커다란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것처럼 소리를 낮췄다. 덩달아 숨을 죽이자 흩어졌다고 여겼던 기대가 가슴 속으로 모였다. 별에 얽힌 신화를 처음 읽었던 날이 꼭 이랬었는데.

 물고기자리야. …이제 아르네는 별들을 잡으면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아. 그래서 나는 후회 안 해. 별들만 있으면, 여기가 어디든 후회 안 해.

 일순 환한 웃음 위로 색색의 실들이 어른거렸다. 아르네, 급하게 입을 열자마자 푸딩 같은 벽이 나를 감쌌다. 아직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벽은 삽시간에 얼굴을 덮었다.

 아르네는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렸다. 눈앞이 깨끗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 같던 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없었다. 꿈이었을까? 이 세계는 시공간이 마구잡이로 뒤틀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걸지도 몰랐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걸 보니 달콤한 꿈을 꾼 모양이었다.

 내 최초의 기억. 아르네는 작은 아이의 키를 가늠하듯 손날로 허공을 부드럽게 잘랐다. 그보다 더 작았던 나이에 너희를 만났었지. 그 전의 기억은 없다. 나쁜 걸 움키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공연히 웃음이 샜다. 그날의 너희가 떠오른 탓이다. 아르네는 손바닥을 쥐었다 펴며 이름을 되새겼다. 레아와 도미닉, 데니스를 만나면 꿈을 이야기 해줘야지. 또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타박이 돌아올 예감이 들었다. 그건 어떤 종류의 걱정이라는 걸 아르네는 알았다. 하지만 어떤 것도 숨기지 않아야지. 커다란 비밀을 그날 바다로 가기 전 말했으니 모두 털어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빨리 사라질 줄 알았다면 다른 것도 물어볼 걸. 이를 테면 제일 좋아하는 별이나… 상념을 흘리며 습관처럼 끝없는 백야를 넓게 둘러보았다. 잊었던 두려움의 형체가 그려지기 시작하면, 아, 저기 있다. 별들과 시선이 마주친다. 아르네는 그들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저편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허공으로 웃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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